짝퉁 게임 전문사에서 "짬뽕의 명가"로 도약하는 릴리스 게임즈
국내에서도 "이젠 중국산 게임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가 나온 지 정말 오래됐죠. 단순히 콘솔/PC에서의 게임의 양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모바일 게임 시장조차 글로벌은 물론이고 국내 시장조차 내어줘 가는 양상이 되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데요.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가 처음 나왔던 십수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면, '릴리스 게임즈'(Lilith Games)에 대한 제 시선은 전혀 곱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엄청 긍정적이진 않지만요. 😂) 출발 신호탄을 쏜 중국 내 히트작 '도탑전기'를 포함해 역대 모든 출시작들이 '워크래프트', '시드 마이어의 문명' 등 다양한 게임 프랜차이즈의 콘셉트, 설정 및 아트 워크 등을 말 그대로 복사 + 붙여 넣기 한 수준의 표절 게임이었으니까요. 실제 게임을 플레이해 보면 각종 게임 콘텐츠들, 그리고 이를 굴리는 시스템, UI 등도 거의 모든 요소가 중국 외 다른 나라 게임들을 그대로 베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고요.
국내 저작권 인식도 여전히 안 좋은 수준이라고 자평합니다만, 릴리스 게임즈의 흥행은 이보다도 훨씬 후진국적인 중국 내부의 대중문화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도탑전기 등의 성공 탓에, 이를 분석한답시고 찬양하는 국내 게임 업계인도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뿐만 아니라 요즘도 (특히 중화권 게임 회사들) 세태를 생각해 보면, 릴리스 게임즈가 아니었더라도 소위 "파쿠리 게임"으로는 누구든 중국 내에서 등장해 시장에서 비슷하게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겁니다. 다분히 결정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중국이란 나라가 그런 상태니까요. (그리고 이런 거대 망나니를 키운 건 미국의 원죄이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표절작을 내놓고, 엄청난 마케팅 비용으로 원작보다 대중에게 노출되는 빈도를 극적으로 늘려, "우리가 진짜 원조 맛집이다"라고 세뇌시키는 행태는 단순히 업계 관행을 넘어, 중국 국가 기조이기도 합니다. 정부와 관영 매체를 중심으로 21세기 홍위병인 '소분홍', '분청'을 앞세운 대 한국·동남아 문화공정이 대표적이죠. 안타까운 건 게임 업계에서도 주도해 온 중국 회사들은 물론이고, 이런 전략이 세계적인 대세가 되었다는 겁니다. 광고비만 받으면 나 몰라라 하는 미국 공룡 플랫폼들을 적극 이용해, 창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상업성은 뛰어난 콘텐츠가 쏟아지는 현 세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죠.
이렇게 만년 짝퉁 게임과 주 라이브 서비스 작품의 광고 스패밍으로 성공가도에 오른 릴리스 게임즈지만, 중국 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단위로 성공을 맛보게 된 뒤로는 어느 정도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당장 '부족 전쟁'같은 웹게임 IP나, 문명 IP의 공식 모바일 게임들이 죽을 쑤는 동안 '라이즈 오브 킹덤즈'는 사실상 압도적인 성장세로 장르 자체를 대표하는 게임이 되어 버렸고요. 이 덕에 "라오킹에서 하는 걸 다른 게임이 참고해 따라 한다"라고 할 정도로 리드하는 포지션에 오르며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AFK 아레나' 역시 코어 시스템을 포함해 많은 요소를 도탑전기에서 이어 왔지만, 워크래프트 IP, 특히 도타를 기반으로 하는 정체성을 던져 버리고, 대신 여러 부족/진영이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천명하는 게임으로 등장했죠. (물론 까 보면 여전히 미국·일본 등 각지 게임들에서 불펌해 온 요소가 한두 개는 아니지만요. 🤭) 특히 이번에 들고 온 신작 'AFK: 새로운 여정'은 전작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게임성과 함께, 미묘하게 타사 게임들과 차별화 포인트를 두는 한편, 다른 게임들의 특장점을 차용해 인게임에 이질감 없이 탑재해 오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다시 한번 릴리스 게임즈 나름의 저력을 보여 주는 게임이 아니었나 해요.
너무 익숙한 게임성에 자질구레한 리뷰가 필요 없는 게임
작정하고 쓰면 AFK: 새로운 여정의 평가는 거의 한 두 문단으로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별달리 새로운 특징이 없습니다. 마냥 나쁘게만 들릴 것 같은데, 사실 이는 게임이 주는 전체 경험의 대부분에서 장점으로 다가옵니다. 최대한 좋게 포장하자면 게임의 가장 큰 특장점은 '죄다 어디서 본 요소들을 너무나 깔끔하게 잘 버무렸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유저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즐거움을,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무리 없이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 '새로운 여정'의 가장 큰 셀링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동화풍의 아트워크부터, 최적화 잘 된 모바일과 특히 공식 PC 버전까지, 설치해서 플레이를 시작하면서 저도 첫인상부터 정말 편안하다고 느꼈네요.
게임의 핵심인 성장은 전작 AFK 아레나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재는 영웅 가짓수가 많지도 않고 레벨 공명에 따라 6개 클래스별 6종 장비만 만들어 주면 되지만, 추가될 영웅이야 차고 넘치며, 아티팩트 등 전작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추가 성장 요소는 언제든 편입될 수 있기 때문에 속단은 이르고요. 메인/서브 퀘스트를 밀거나, 지도상에서 수수께끼를 풀거나 보물 상자를 찾아내고 로밍 몬스터를 사냥하는 등의 활동으로도 성장이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게임 기준으론 자동사냥 방치에서 오는 자원이 성장 파이의 50% 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나머지 50% 정도는 말 그대로 영웅 뽑기, 도감작과 반복 획득을 통한 영웅 수직 성장에 달려 있는데요. 다이아(기본 유료 재화)나 뽑기권은 인게임에서 획득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평균을 냈을 때 매일 얻을 수 있는 수량이 한정적이고, 아마 런칭 스펙을 모두 달성한 이후에는 당분간 손가락만 빨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대신 모바일 가챠 게임의 특성상 정말 다양한 이벤트가 상시 열려 있고, 이를 통해 수급하는 뽑기 관련 자원이 많기 때문에 아마 과금을 아예, 혹은 거의 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뽑기를 통해 성장을 하는 게 가능하긴 할 겁니다.
전투는 육각 타일의 스테이지 (반)자동 전투이며, 확실히 AFK 아레나보다는 한 단계 나아간, SRPG스러운 탑/아이소메트릭 뷰의 전투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맵 자체도 각종 장애물이나 오브젝트 등이 들어가는 전투가 많아서, 아마 기존 방치형의 매뉴얼 전투들보다는 미세하게 더 재밌다고 느끼시지 않을까 해요. 매 전투 영웅을 교체, 진형을 조정하는 것도 쉽고 재밌지만 부담감도 적고요. 전반적으로 영웅들 움직이고 싸우는 느낌이 기존 한중일 수집형 RPG보다는 오토체스류 게임과 비슷하다는 감상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느낌은 주요 전투 콘텐츠 중 하나인 '명예의 결투'에서 확신으로 변하는데요. 아예 오토체스식 투기장 콘텐츠를 만들어 놨는데, (초회차에 무게가 쏠려있긴 합니다만) 보상이 꽤 쏠쏠하고, 자신이 보유한 영웅 성장도에 관계없이 정말 무과금부터 동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뭐 엄청 독창적인 요소는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굉장히 재밌어서 개인적으로는 일일 플레이 타임을 늘리는 콘텐츠 중 하나가 아니었나 해요.
물론 이 외에도 아주 다양한 콘텐츠가 있지만, 대부분 다른 방치형 RPG, 수집형 게임들이나 하다 못해 전작 AFK 아레나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전투 중심의 콘텐츠(길드 보스, PvP, 로그라이크 콘텐츠 등)라 자세히 다루어 봐야 피로감만 높아지겠다 싶습니다. 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존 게임들을 즐기던 게이머 입장에선 "즐기기 위해 있을 건 다 있다"라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
정수를 수집해 성장하는 "원시 저그"같은 릴리스의 저력을 보여주는 게임
전반적으로 AFK: 새로운 여정의 매력 포인트는, 지금까지 릴리스 게임즈가 다양한 게임을 개발해 오며 발전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매력적인 그래픽 스타일을 통해 AFK 세계관을 확장 적용하며 흥미로운 스토리를 전달한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솔직히 방치형 게임은 포화 상태이다 싶을 정도라서, 이런 점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더 나은 시스템의 게임, 더 편한 방치형 게임을 찾는 것도 크게 어렵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마찬가지로 스토리 중심형 게임이나, 오픈 월드 탐험 게임들 역시 모바일뿐이 아니고 콘솔이나 PC 쪽에 대체재가 널려 있어서, 게이머 입장에서도 굳이 웃돈 써 가며 피곤하게 P2W Freemium 게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네요.
AFK 아레나의 경우, 매력적인 콘셉트와 그래픽을 제외하면 유저가 게임에 몰입할 수 있을만한 스토리 자체가 전무했습니다. 시도는 있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죠. 이런 관점에선 말 그대로 애착을 가지고 유저가 게임에 오랜 기간 정착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유저 풀을 지지해줘야 하는 중·소과금 ~ 무과금 유저들은 특정 스테이지에서 장기간 막히는 등 정체기가 오면 큰 고민 없이 게임을 버리거나, 비슷한 재미를 주는 다른 게임으로 이동할 확률도 높을 거고요. 이런 생태는 이미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 그야말로 한탕을 노리는 시장의 수많은 방치형 게임 개발사들이 이미 증명을 하고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모바일 게임을 해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게임들에서 "고래" 유저들도 유저가 적은 게임을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고요. 매몰 비용이 있더라도, 게임이 망해 간다면 과금 수준이 높은 유저들 역시 결국엔 게임을 떠나버리죠. 물론 AFK 아레나는 굉장히 성공한 게임입니다만, 이렇게 부족한 락인 요소들이 보완이 됐더라면 오히려 더 대박을 칠 수도 있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목표가 정확히 뭐였는지는 내부자들만 알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여정'에는 이런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대한 오픈 월드,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실질적인 대서사시 느낌의 시나리오를 첨가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기술적인 수준이 높아졌고, 다양한 요소가 추가됐고 이런저런 부연 설명도 분명 가능합니다만, 4년 만에 나온 차기작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 놀랄 것도 없고, 오히려 전작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 실망스러운 점도 굳이 집어내자면 없진 않지만요. (물론 한미일 다른 회사들 게임들 생각해 본다면 또 무시할 수준은 아닙니다. 🤣) 특히나 "양산형 게임"들에 모바일 게이머들조차 거부감을 표하는 요즘 시기에 그래픽, 레벨 디자인, 배경 음악과 CV, 퀘스트라인까지 티 나게 신경 써서 만들어, 사실 전작이나 경쟁작들과 거의 차별화가 없는 내용물을 완벽하게 위장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거의 예술의 경지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특별하고 고유한 무언가를 가진, "GOTY" 운운할 정도의 대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릴리스 게임즈의 방치형 게임들의 팬이거나, AFK 특유의 아트풍을 좋아하시는 분들, 스토리 중심의 RPG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 등 굉장히 넓은 유저층에서, 익숙한 느낌으로 편하게 입문하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는 수작이라고는 충분히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