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 시장, 특히 모바일 게임들을 플레이하시는 분들이라면 현금 결제를 통해 살 수 있는 아이템 상품이 꽤 친숙하실 텐데요. 오늘날 게임에 대한 이슈 가운데 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히 논의가 진행되어 온 것은 아마도 게임사가 판매하는 상품들 중에서도 확률형 아이템, 그리고 이에 대한 규제 확립이 아닐까 해요. ‘게임 중독의 질병코드 등록’과 같은 다른 주제들과는 달리, 다수의 게이머들과 정치권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쟁점이지만, 콘텐츠 분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게임 업계의 주 수익원이기도 한 만큼 산업적으로는 꽤 민감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확률에 의거한 뽑기 상품의 기원
온라인 게임에서 확률적으로 보상을 획득하는 아이템을 판매한 최초의 사례로는 우리에게 특히나 익숙한 넥슨(NEXON)의 '메이플스토리'(MapleStory)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4년도에 넥슨은 일본 서비스 중이었던 메이플스토리에서 '가챠폰티켓'을 판매했는데요. 이런 상품권형 아이템을 구매해, 주어진 확률에 따라 임의의 보상을 획득할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미 장난감 뽑기에 익숙했던 일본 고객들에게 넥슨의 확률형 아이템은 예상보다 더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고, 이는 이후에 넥슨이 일본 서비스는 물론 국내·외 다양한 온라인 게임에 확률형 상품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BM)을 도입하게 되는 초석이 되기도 합니다.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이템 명에 쓰인 '가챠폰'(ガチャポン)은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난감 캡슐 뽑기 기계를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반다이의 캡슐 토이 브랜드인 '가샤폰'(ガシャポン)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뽑기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경쟁 업체나 기타 미디어에서 상표를 함부로 언급할 수는 없었기에 이를 우회하고자 쓰이기 시작된 명칭입니다. 게임의 뽑기 상품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이는 "가챠"(Gacha)라는 표현의 기원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캡슐 토이 역시 그 기원을 일본이 아닌 미국에 두고 있다는 사실! 바로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알록달록한 껌이 나오는 '껌 볼 머신'이 시조라고 볼 수 있는데요. 미국에서 기계를 도입하며, 일본에서는 소형 장난감 등을 넣어 뽑게 만드는 참신한 변화를 주어 완구류 판매에 활용했고, 큰 히트를 치게 되면서 지금은 일본의 가장 큰 소비문화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게임과 뽑기를 논하면서 미국을 빼 놓고 이야기하기는 굉장히 어려운데요. 현대적 게임의 발상지이기도 한 미국 시장에서는 비디오 게임 이전에도 이미 확률에 따라 상품이 지급된다는 것이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분들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카지노와 같은 도박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뽑기식 벤딩 머신은 물론이고, 이 외에 어린이나 청소년을 주 타깃으로 한, 좀 더 가족적(?)인 프로덕트도 많이 존재해 왔어요.
대표적인 상품을 하나 꼽자면 MLB 선수들의 멋진 프로필을 담고 있는 공식 카드(Baseball Cards)를 들 수 있겠습니다. 안쪽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은박 포장지 안에 든, 임의의 카드들을 사 모으는 한편, 서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컬렉션을 완성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흔히 "트레이딩 카드"(Trading Cards)라 불리는데요. 이는 다시 '유희왕', '포켓몬스터' 등 여러 IP의 카드 게임(TCG) 방식으로 확장 적용되기도 했어요. 때문에 혹자는 수집 가능한(Collectable) 요소를 가진 온라인 게임들에 트레이딩 카드식의 과금 모델 적용이 생각보다 느리게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결국 한국 게임 서비스의 확률형 상품의 레퍼런스가 되는 일본 장난감 가챠의 기원은 미국의 상업적 아이템들에 그 뿌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꽤 복잡한 계보를 가지고 있죠?
이제는 업계 표준이 되어 버린 확률형 상품
이처럼 2000년대 중반 처음 도입되어 뿌리 내리기 시작한 온라인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 상품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구매자 숫자에 절대적으로 비례하고, 특히 당시엔 불법 복제 문제까지 더해 매출 기대치가 낮았던 패키지 게임 판매 방식은 물론이고, 그 이전까지 온라인 게임에서 요구하던 사용 시간 판매(정액제)나 확정 아이템 상품들보다 훨씬 높은 수익성을 보였기에 게임사들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죠? 체험판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게임을 해 보기도 전에 결제부터 요구하는 기존 판매 관행의 한계를 타파하고자 "부분 유료화"를 선언하고 있었던 온라인 게임사들의 'Free-to-Play'(F2P) 기조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에서 직·간접적으로 판매하는 확률형 상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속칭 "3N"으로 대표되는 한국 주요 개발사들의 게임에는 물론이고요. RPG 유형이 아니더라도 EA의 Madden NFL이나 FC(구 FIFA) 시리즈와 같은 스포츠물, 하스스톤이나 매직: 더 개더링 아레나 같은 CCG, 아니면 오버워치, 카운터 스트라이크, 배틀그라운드(PUBG) 등과 같은 FPS/TPS에서조차 다양한 외형의 뽑기 상품을 확인할 수 있죠. 기존에는 스킨(외형) 상품을 정찰제로만 판매하던 리그 오브 레전드(LoL)에서도 루트 박스를 도입하기 시작하더니, 작년부턴 최상위의 신규 등급 스킨을 낼 때 가챠 시스템을 이용해야만 얻을 수 있도록 해 유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뽑기가 있는 게임보다 없는 게임을 솎아 내는 게 더 빠를 지경이 되고야 말았죠.
게임 속 뽑기를 바라보는 상반된 유저의 시선
이런 게임 서비스의 변화에 대한 게이머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우선 짚고 넘어갈 점은, 일부 커뮤니티나 언론을 통해 표출되는 격한 비난 여론과 달리, 생각보다 실제 이용객들은 이런 과금 정책에 호의적이란 사실입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수요 없는 공급이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보통 개별 게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유저일수록 지갑을 열게 될 확률이 높고, 또한 더욱 고급 보상을 목표로 더 많은 돈을 쓸 확률이 높습니다. 1인당 지출 규모는 경제적 결정권을 강하게 쥐고 있는 성인층, 특히 40대 전후나 그 이상의 남성층이 높은 편이고요. 전략이나 상황 판단력, 순간 반응 속도 등 플레이적인 요소 외에 남들보다 더 강해지는 차별화를 노리고 유료 상품을 다량 구매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게임 장르와 BM, 타깃 유저의 성향에 따른 매출 상관관계는 별도 주제의 글을 따로 작성하는 게 나을 정도로 설명이 길어지지만, 국내 시장을 기준으로 요약하자면 주로 모바일 게임, 특히 수집 요소가 있는 "리니지라이크"와 같은 MMORPG나 서브 컬쳐 수집형 RPG, 방치형(idle) 키우기 게임 등을 즐겨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대체로 높은 구매율을 보이고요. 처음에 언급했던 메이플스토리처럼 장수하고 있는 일부 대형 개발사 게임들의 팬덤 역시 확률형 아이템 구매에 호의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게임들이 국내 서비스 매출 상위권에 다수 포진되어 있는 것도, 결국은 현재의 판매 구조에 만족하는 게이머들이 꽤 다수라는 것을 방증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반면 단순히 머릿수로만 본다면, 이런 부분 유료화 게임에 선뜻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게이머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고객들의 경우 뽑기 상품이 있는 F2P 라이브 서비스 게임보다는 이용 시간을 구매하거나, 게임 라이센스/다운로드 가능한 콘텐츠(DLC)를 직접 사는 것을 더욱 선호하고요. 또한 무료 이용이 가능한 게임을 하더라도 LoL처럼 실제 경쟁적인 인게임 코어 플레이에는 영향이 없는 아이템만을 판매하거나, 확률적인 요소 없이 고지된 아이템을 정찰제로 판매하는 게임에 비교적 반감이 적고, 직접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시청하고 보상을 획득하는 등 차선책이 있는 게임에 더 호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런 고객들은 모바일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하지만, PC나 콘솔 기기를 통해 플레이하는 게임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는 경우가 많고요. 유저 간 겨루기 요소가 있더라도 캐릭터나 계정의 성장으로 점철되는 "분재(盆栽)형" 게임보다는, 공정한 시작점부터 서로의 실력을 판가름할 수 있는 경쟁 시스템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아예 유저 간 교류가 없는 싱글 플레이어 게임, 게임 자체의 서사에 집중하는 스토리 중심의 게임 등 경쟁형 PvE, PvP 게임을 넘어 더욱 다양한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까지 포함할 수 있는, 더 넓고 포괄적인 타깃 유저군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게임 업계의 오늘과 내일: 확률형 상품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팬데믹을 맞아 언택트 시기를 거치며 활짝 웃을 수 있었던 게임 회사들은, 미국발 고금리 시대를 맞으며 휘청이기 시작합니다.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많은 게임사들이 매출 하락에 대응하고자 구조조정을 실행하는 등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선 상황이고요. 코로나 락다운이 풀리면서 게임에 쓰이던 지출이 바깥으로 향하게 된 것도 악재였지만, 삶이 팍팍해지면서 충동 소비, 과소비, 과시 소비 풍조에 반발해 대두된 'YONO'("You Only Need One"), '지연된 만족'(Delaying gratification)과 같이 대중의 소비 패턴이 변하게 되면서 게임 회사들의 수익성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한편 다수의 메이저 게임사 매출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규제는 꾸준히 강화되어 온 상황입니다. 당장 국내만 해도 게임산업법이 꾸준히 보완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게임물을 서비스하는 경우엔 의무적으로 유형에 따라 게임에서 현금이나 유료 재화로 판매하는 캡슐형 아이템/강화형 아이템/합성형 아이템의 확률을 의무적으로 세세하게 공개해야만 합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게임물관리위원회 역시 게임들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있고요. 실제로 올해 초 공정위는 메이플스토리의 "보보보" 확률조작 사건 등에 대한 조사 이후 넥슨에 역대 최대 규모의, 무려 116억(!) 상당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죠. (*일각에선 영업 정지를 피한 만큼 넥슨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확률형 상품의 규제 강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기도 합니다. 뽑기에 빙고를 이중으로 덧대, 유저가 확률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금전 투입을 유도하는 "컴플리트(Complete) 가챠"를 법적으로 금지하기도(일본) 하고, 특정 아이템을 얻기 위해 진행하는 뽑기의 확률을 백분율 기호(%)가 아닌 횟수로 명시하도록 해, 소위 말하는 "천장"을 의무화하는 경우(중국)도 있고요. 심지어는 도박과 다름없다는 해석에 따라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을 법정에 세워 도박법 위반 판결(네덜란드)을 내리거나, 확률형 아이템의 판매를 금지하는 케이스(벨기에)까지 등장하고 있어요.
이런 규제 강화의 배경에는 보수적인 정치권의 시각뿐만 아니라, 직접 해당 상품을 구매하는 유저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과거 작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제한적으로 교류하던 시절과 달리, 요즘의 게이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데요. 평상시 게임을 잘 즐기지 않으시는 분들도 국내 게임사들로 향하는 ‘트럭 시위’에 대해서는 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온라인 게임들에서 있었던 잦은 확률 조작이나 표기 오류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점점 더 심해져 가는 과금 유도 양상, 일부 게임사의 고객 서비스 부실/운영 실패 문제가 반복됨에 따라 피로감이 누적된 게이머들이, 게임 속이나 온라인 공간을 넘어 고객으로서, 그리고 유권자로서 오프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이 게이머에게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확률형 아이템 중심의 BM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어요. 때문에 국내·외 여러 게임 회사들은 이런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는데요. 확률형 아이템 판매 규모를 축소하거나, 정찰제로 회귀한 BM을 다시 찾는 것처럼 소극적인 대응부터, 아예 PC나 콘솔 중심의 패키지 게임 개발로 노선을 바꾸는 등 회사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행이 물 흐르듯이 매끄러운 상황은 아닌데요. 앞서 언급했듯이, 패키지나 이용권을 판매하는 방식은 (시장에서 독·과점적인 지위를 얻지 않는 이상) 확률형 아이템을 판매하는 F2P 게임보다 수익성이 낮은 만큼, 단기적으로 회사의 수익성이 낮아지면서 진통을 겪게 될 수도 있고요. 모바일 게임에 집중하면서 PC나 콘솔 게임 개발 노하우 및 인프라를 잃어버린 상당수 국내 개발사들의 경우, 뚝심 있게 AAA급 게임을 개발해 온 해외 대형 게임사들, 그리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인디 개발자들과도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은 어쩌면 자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5년 뒤, 10년 뒤엔 어떤 게임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게 될까요? 지금과 같은 BM은 미래에도 계속 존속할 수 있을까요? 게임 시장의 변화에 자연스레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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