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평 요약 : 8/10, 추천!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SF 영화. 마틴 집안에 오게 된 안드로이드 앤드류가 다른 로봇들에겐 없는 창의성을 보이고, 이에 주목한 주인 제럴드 덕에 가사 외 다양한 인간 활동을 하게 됨에 따라 인간성을 가지게 되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그려낸 작품. 인간이 된다는 것, 누군가를 인간으로 정의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곱씹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영화. 주인공 앤드류 역의 로빈 윌리엄스를 중심으로 톡톡 튀는 코미디와 열연에도 깨알 같은 즐거움이 있어요.
로봇에서 인간으로,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 앤드류 이야기
'바이센테니얼 맨'은 1999년 개봉한 SF 영화입니다. 아마 주연인 로빈 윌리엄스의 팬이라던가, 그게 아니면 예전에 보았던 경험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꽤 오래된 영화이다 보니 대부분 잘 모르실 것 같네요. 같은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확인하면서, 첫 해리 포터 3부작 영화들이 2001년 ~ 2004년 사이에 나온 걸 다시 확인해 보면서 새삼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이들 모두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멋진 영화들이지만요. 어쨌거나 바이센테니얼 맨은 SF 소설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동명의 단편 소설(The Bicentennial Man; 한국에선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로 번역)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소설은 1976년 등장했으며, 영화의 개봉 시점부터는 불과 6년 뒤인 2006년을 배경으로, 현대에도 불가능한 단계의 기술 수준(예컨대 인간 활동을 완전히 카피해 가사 노동을 대체해 줄 수 있는 로봇이 있다던가...)을 이룩한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나름 공상과학 영화이지만, 은하 하나를 통째로 배경으로 하는 스타워즈라던가 다른 SF 작품들에 비하면 그 세계관은 꽤 협소한 편입니다. 이는 바로 주인공 '앤드류'(Andrew, 그가 "작은 아씨"라고 부르는 '아만다'가 안드로이드 기종인 'NDR-114'를 잘못 듣고 되물으면서 지어진 이름)를 3인칭 시점으로 관찰하는 일대기 형식의 영화이기 때문이죠. 앞서 요약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앤드류는 로봇임에도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창의성을 가지게 되는데요. 이를 눈여겨보고 있던 주인 리처드에 의해 아이들을 돌보거나 주방일을 하는 등의 가사 노동에서 배제되는 대신, 일종의 자기 계발을 할 수 있게끔 배려받게 됩니다. 그 덕에 앤드류는 다양한 책을 읽기도 하고, 목공예를 하고 물감 칠을 하거나, 리처드와 함께 인간적인 코미디, 농담하는 법을 배우는 등 점점 인간의 삶을 배우게 되죠. 고부가 가치의 수제 시계 등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팔게 되면서 엄청난 돈을 벌게 되고, 그 돈을 고스란히 마틴 가에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앤드류 명의의 계좌를 통해 가지게 되면서 소유에 대한 개념도 가지게 됩니다. 말 그대로 현대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 받을 수 있는 모든 교육을 로봇으로서 향유하게 되는데요. 그 결과 앤드류는 하나의 개체로서 스스로에 대한 자각, 이와 함께 더욱 발달한 인간적인 감정들, 그리고 인간이 갈구하는 자유 등의 가치에 대한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물론 앤드류의 앞에 꽃길만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과 동일하게 가족들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전제하지만,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그에게 화가 난 리처드에 의해 마틴 가에서 쫓겨나기도 하고요. 이후 노령의 리처드가 죽기 직전의 병상에서, 그에게 사과를 받고 화해하긴 하지만요. 그렇게 소중한 이를 잃고 나서는 "자신과 같은 이가 더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며 몇십 년간 각지의 안드로이드 로봇들을 하나씩 방문하지만, 단 한 개체도 자신처럼 창의성, 자율성을 가졌거나, 적어도 그런 싹이 보이는 케이스조차 찾지 못합니다. 또 마지막으로 만난 로봇 '갈라테아'의 주인인, 원조 NDR 안드로이드 설계자의 아들 '루퍼트 번즈' 덕에 인간 피부 업그레이드를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작은 아씨는 이미 백발이 희끗한 노인이 되어 있고, 젊은 시절 그녀와 똑 닮은 외모의 손녀인 '포샤'를 만나면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가동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아만다 역시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이들이 다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하는 생각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앤드류는, 번즈와 함께 사람의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는 차세대 인공 장기들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를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하게 되고, 생물학적으로 더욱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감각을 가지고 살게 되면서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게 되기도 하죠.
원작의 인간성 서사에 추가된 사랑 한 움큼
특히 아직 로봇으로 존재했던 과거에 놓쳤던 사랑인 작은 아씨와 판박이인 포샤와 함께 하면서 앤드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바로 진정한 사랑에 빠진 것인데요. 이는 원작 소설에서 다루는 인간성의 주제에서는 없는 내용입니다. 신체가 기계/인공 장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앤드류는, 처음 제대로 마주하는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서 너무나도 혼란해합니다. 기계인 자신에게 온전히 마음을 줄 수 없다는, 둘 사이의 관계가 사회에서 납득되지 않을 거라는 포샤의 이야기도, 야속하고 동감이 되지 않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죠. 하지만 결국 이 둘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고 진정한 도덕이라는 포샤의 말을 따른 앤드류의 충동 어린 키스를 통해 이후 평생을 함께 하게 됩니다.
이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현실화한 앤드류는,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인간 사회를 바꾸고자 합니다. 포샤가 우려한 미래는 현실이 되었고, 앤드류는 사회에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들의 결합은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하죠. 물론 두 사람의 삶은 충만하지만, 포샤의 행복과 자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수용에 대한 염원을 갈구했기에 앤드류는 작중의 세계 대회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고 계속해서 탄원합니다. 물론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이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데요. 바로 "불멸의 인간은 다른 이들의 시기를 살 것"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다소 유치하지만, 동시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앤드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인정받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려 자신의 영생을 포기하게 되는데요. 루퍼트를 찾아 신체가 늙어 소진되게 만드는 마지막 개조를 진행하고, 세계 대회에 자신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고 다시 요구하죠. 이후 앤드류는 몇십 년이 더 지나고, 노환으로 죽어가는 병상에서나 비로소 세계 대회의 인정을 받게 되지만, 선고 내용이 낭독되는 시점에 이미 그는 사망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간호사가 된 갈라티아의 말처럼 앤드류가 자신이 인정받게 되는 것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어지는 포샤의 대답처럼 "어쩌면 그에겐 필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죠.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인간성에 대한 또 한 번의 고찰
원작을 비롯한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작품들처럼, 바이센테니얼 맨이 훌륭한 점은 단순히 인간 앤드류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고, 더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는 누군가를 한 인간으로서 인정한다는 것, 특히 도대체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한 세상에서 살고 있죠. 이미 트랜스젠더 논의와의 연결 고리를 찾는 리뷰도 있고요. 발전된 인공 장기 이식과 유전과학으로 완전히 성별을 바꾼 사람을 어떻게 카테고리화할 것인지, 만일 이런 이들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현시대의 인식과 기술을 토대로 하여 반대 성별로 이동한 이들은 왜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또한 앤드류와 같이 스스로 사유하는 AI가 등장하고, 이런 개체가 충분히 인정할 만한 인간성을 보인다던가, 혹은 스스로 인간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경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또한 이런 결정들 이후에 달라진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등의 고민 역시 충분히 필요하고요. 2014년 개봉 영화인 '트랜센던스'에서와 같이, 인공두뇌로 자신의 모든 지식과 인격성을 전부 옮겼을 때, 이를 단순히 AI로 규정해야 할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라던가, 반대로 (영화에서 앤드류가 세계 의회에서 했던 말처럼) 두뇌를 제외하고 신체의 모든 부분을 인공화한 이를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지, 영화 말미의 갈라티아처럼 인간성을 가지게 되면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로봇 3원칙'을 거부할 수 있는 로봇이 생길 수 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만일 대응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따위의 논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모두 영화를 보고 난 이후라면 쉽게 던질 수 있는 의문이면서, 동시에 (인간사의 특정한 어느 시점까지는) 해답이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죠.
가사 도우미 로봇으로부터 200살 먹은 노인이 되기까지, 영화 속 앤드류의 삶은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자신과 주변의 도움을 총동원해, 물리적·생물학적인 장벽을 최대한 허물어 내면서 끝끝내 인간으로 인정받게 되죠. 보통 생명체로써의 인간이라면 더욱 연장된 삶, 영생을 이루고자 하겠지만, 반대로 앤드류는 한 인간으로서 영생을 포기하고 정해진 수명을 선택해 존엄하게 죽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인데요. 사실 사회에서의 인정을 제외하면, 결말 이전부터 꽤 오랜 기간 앤드류는 보통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조건을 대부분 만족하고 있습니다. 고등 생물인 인간 그 이상의 지능에,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의 감정에도 공감하고 포용하며 교감할 수 있는 앤드류가, 결국에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해 준 마지막 조건은 시한이 정해져 있는 죽음이었다는 점은, 인간들의 억지로 보이기에 다소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물학적 유한함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항상 인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인간성의 화룡정점으로서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 앤드류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면서, 울리고 웃기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좋은 영화가 아니었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