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평 요약 : 8/10, 매우 추천!
1980년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리파르벨라에서 살아가는, 수맥을 읽어 땅 속의 유물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는 실각한 고고학자 아르투가 겪는 일들을 그려가는 작품. 상반되는 이탈리아식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가 아이러니하게 조화하며 돋보이는 놀라운 영화.
저승에 한 발짝 걸친 이상한 고고학자, 아르투의 여정
'키메라'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가 생각보다 꽤 많은데요. 그중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국내에서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행복한 라짜로'로 꽤 인지도가 있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Alice Rohrwacher)의 2023년 작품(La Chimera)입니다. 국내에선 오는 4월 3일 개봉 예정으로, 칸 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한 독립 영화예요. 저는 운 좋게 시사회에서 미리 보고 왔습니다.
영화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타이틀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키메라라는 것 자체가, 이런저런 동물들이 뒤섞여 있는 신화적 존재를 지칭하는데요. 물론 그런 어원 때문에 단순히 환각, 환상이나 정신적인 날조물 등 현실성이 없는 무언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포털의 간단 설명만 읽어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아르투는 땅 속에 묻힌 유물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죠. 이를 "초능력"이라고 단순 번역해 전달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보통 지칭하는 슈퍼히어로 같은 느낌은 아니고요. 오히려 지면 아래 유적지를 인식하면, 무당이 '접신' 하듯이 광적인 혼돈에 빠지고, 마치 앞발로 정신없이 흙을 파는 개와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데, 극 중에서 다른 이들이 이를 "키메라 상태"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환각 상태인 건데, 당연히 무슨 마블 영화처럼 스토리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고요. 본 작품에서는 인간계와 영혼계가 접목된 듯한 그의 정신이 마치 '키메라와 같다'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는 영적인 키메라인 주인공 아르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아르투는 영국 출신의 전 고고학자로, 영화 도입부에서는 도굴을 하다가 친구들에게 버려진 상태로 홀로 단속에 걸려 수감 생활을 한 뒤 풀려난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보석은 도굴품들을 사들이고, 출처를 세탁해 고가의 경매로 전 세계에 팔아넘기는 장막 속의 바이어 스파르타코가 지불해 주었죠. 참고로 아르투의 본명은 아서(Arthur)인데, 그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이탈리아 토스카나 사람들이니, 이탈리아 음차로 "아르투"라고 불리고 있죠. 개인적으론 재미있는 디테일이라고 생각했네요. 어쨌거나 그는 상술한 능력으로 영혼 세계의 자취를 인지해, 기원전 토스카나에 존재한 에트루리아 시대 유물들을 땅 속에서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걸 자신이 대빵으로 추대되어 있는, 지역의 잡스러운 청년 도굴단인 '톰바롤로(Tombarolo; pl. tombaroli)' 친구들과 함께 파 내서 스파르타코에게 팔아넘기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왔고요.
영화 내내 아르투는, 스스로를 작은 마을인 리파르벨라(Riparbella)에 뿌리내리게 만든 가장 큰 이유로 보이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연인 베니아미나를 그리며 괴로워합니다. 아직 그녀를 잃은 공허함을 전혀 채우지 못한 그는, 도굴한 장물을 몰래 숨길 겸 숲의 언덕배기에 지어 둔 무허가 판잣집을 거점으로 생활하지만, 역시 본인과 비슷하게 현실을 부정하며 "베니아미나가 돌아왔을 때"만을 기다리는 그녀의 어머니 플로라와 밀접하게 교류하며 살아가죠. 그리고 작중 처음 만나게 되는 새로운 얼굴, 플로라의 노래 문하생이자 무급 집사인 이탈리아(사람 이름 맞습니다.)를 출소 직후 플로라의 저택에 들러 만나게 되는데요. 음악적 재능은 없지만 꿈은 크고, 새침하면서 엉뚱하지만 솔직하고 줏대 있는 그녀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는 영화 내내 핵심 줄거리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키메라'에는 주인공인 아르투를 중심으로, 속세의 인물인 이탈리아와 정신적 존재인 베니아미나, 두 명의 뮤즈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아르투는 잠에 들어 꿈을 꾸거나 공상을 할 때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과거의 베니아미나를 그리워하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 공감하면서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있고, 도굴은 옳지 않은 일이며 무덤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남긴 매장품이기에 "인간이 보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호소하는 현재의 이탈리아로 인해 더욱더 흔들리게 되죠. 과거와 현재의 두 여인 사이에서 아르투는 괴로워하고 혼란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구속하던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는 내려놓기도 하고, 불완전하기는 하나 현실을 초월해 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네오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 양 극단의 조우로 만드는 하모니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이보다 더 이탈리아 영화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감상이었는데요. 토스카나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너무나도 이탈리아적인 풍경을 화면 속에 집약적으로 잘 담아냈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아르투와 인물들을,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시선으로, 소박하면서도 동시에 극적으로 담아낸 카메라가 네오리얼리즘(Neorealismo)의 원류인 이탈리아에서 온 작품다웠다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디테일한 해외 리뷰들을 읽어 보면, 어느 한 두 가지 장르로 정립하기가 어려우며,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들이 있는데, 이에 동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현장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특징이 있었기에 그런 모든 것들이 가능하지 않았나 첨언하고 싶어요.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에서는 실제 사회 문제이기도 한 고대 유적 도굴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북부에 몰린 대도시의 부가 닿지 않는 시골에서, 기회가 없는 시골 사람들, 청년들의 아픈 현실 역시 드러내고 있는 식이죠. 선과 악, 주인공과 적대자를 줄거리 내내 명확히 구분 지어 놓고, 카메라 앵글은 물론 플롯을 포함한 스크린 속의 모든 것이 다분히 작위적인 장치가 되는 대부분의 상업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물론 '키메라'가 2차 대전 주변의 신사실주의 영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설정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이미 비범하고 기이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그가 겪는 비현실적인 현상이나 꿈, 환각, 그리고 이에 기원하는 말도 안 되는 행적들은 물론이고, 숨겨둔 아이들이 결국 발각되면서 플로라의 저택에서 쫓겨나자, 이전에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공공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던 리파르벨라 폐역사를 리모델링해 여러 가족이 모여 사는 작은 공동 살림채처럼 만들어 가는 이탈리아의 모습 등,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내용들이 스크린 타임 중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고요. 애초에 '땅 속에 묻힌 에트루리아 유물을 보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받아들인 영화 도입부부터 이미 현실과는 거리가 멀죠. 특히 베니아미나를 그리는 아르투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지 못하면 전개가 안 될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여기에 열과 성을 다해 공을 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와닿습니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모여 아방가르드하고 초현실적인 작품성을 만들어 내고 있고요.
영화 전반에서 아르투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때로는 고분 속 흙 내음이 나겠다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지면에서의 모습을 담아내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놓아주지 못해 계속해서 찾아다니는, 잃어버린 사랑인 베니아미나, 그리고 그녀와 함께한 과거의 모습을 빛바랜 필름 영상을 교차해서 흘려보내기도 하죠. 독특한 점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을 것만 같은 두 사조의 특성이, 마치 키메라처럼 조화롭게 뒤섞이고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는 것, 그리고 덕분에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어떤 것이 실제이고 어떤 것이 비현실인지, 구분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이런 특성은 아르투의 여정이 달콤 씁쓸한 결말로 치달을수록 아주 두드러지는데요. 때문에 개인적으로 '키메라'를 특별한 영화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만남에서 비롯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 자체로 한 마리의 기묘하지만 아름다운 키메라와 같다는 감상의 영화가 아니었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