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평 요약 : 8/10, 추천!
나쁜 놈이 작당모의하여 원하는 것을 모두 쟁취하고 승리하는, 악인 전두광과 하나회 중심의 충격적인 서사. 통쾌한 반전은 없었지만,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의미 있는 영화.
반전은 없었다... 정직한 결말의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을 극장에서 보고 왔습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역대급 고구마라는 정체성으로 통하는 상황인데요. 사실 저는 그런 점 때문에 궁금해서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22일 개봉해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났고, 이후 박스오피스에서 내리 1위를 기록하며 어제까지 누적 관람객 236만 명 집계, 흥행에는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관람 전, 내심 내용이 180도 반전된 대체 역사를 바랐는데요. 저와 같은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영화, 결국 개운한 것도 없고 즐거운 내용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리 순탄하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유사한 톤의 영화인 1987과 비슷한 흥행 노선을 따르고 있습니다.
영화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역사물로, 일부 상상력이 동원된 디테일을 포함한 변경점을 제외하면 서사는 한국 현대사 궤적 자체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포일러랄게 사실 없죠. 2시간이 넘는 꽤 긴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 사건 경과를 모두 담아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시간입니다. 배경 전말을 알고 싶으시다면 관련 자료를 찾아보시는 게 더 이해가 수월하실 거예요.
앞서 이야기 했듯이 반전은 없기에, 내용을 어떻게 풀어내고, 어떤 점을 전달하고 싶었는지가 주요 관람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데요. 뭐, 다들 아시듯이 영 찜찜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과정에서의 몰입감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해요. 배우들 모두 실제 역사 현장에 있는 것처럼 출중한 연기를 선보이고, 연출 자체도 훌륭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수준의 긴장감으로 영화를 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다른 의미로 좋았습니다.
악인 전성시대, 고전적 영웅 서사를 뒤집어 던지는 서울의 봄
서울의 봄에서 주인공(protagonist)은 누가 뭐래도 전두광(황정민)입니다. 영화는 박정희 처단으로 유신 체제가 몰락하고 민정 이양이 되는 과정에서 권력 뒷선으로 밀릴 처지에 놓은 전두광이, 친구 노태건, 그리고 하나회 구성원들과 함께 속도전의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 성공하는 모습을 그린 악인 중심의 서사를 가지고 있죠. 육사 출신 하나회 연줄을 총 동원해, 북한을 막아야 할 전방부대와 특전여단들까지 끌어들이고 준 전시 상태의 내란 소요를 일으키며 권력을 잡는 모습은 철저하게 사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런 모습에 몰입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실 더욱 눈이 가는 것은 극 중 수도경비사령관을 맡는 이태신 소장(정우성)의 행보이죠. 사조직 하나회가 일으킨 국기문란 무장 정변에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참군인이자 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스크린에서 전두광과 동급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요.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대칭적인 두 인물의 라이벌 관계는 첨예하고 극명하게 그려집니다. 이 과정에서 아마 많은 분들이 이태신을 응원하면서 관람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전체 플롯에서 그는 주인공 측의 시각으로 일관되게 적대자(antagonist)의 역할을 맡고 있고, 그에게 주어지는 결말은 참혹하면서도 너무나도 뻔하죠.
서울의 봄이 보는 이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이유가 사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인인 주인공이 고충을 겪지만, 본인의 능력과 기지를 백분 발휘하고, 때로는 부정한 아군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결국 선한 적대자를 몰락시키고 응당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는, 추악한 역(逆) 영웅 서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전반에서 이런 스토리텔링에 총력을 기울이며, 결과적으로 그 어떤 이질감 없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냅니다.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에게 색다른 충격을 안겨 주고 있고요.
반역자와 권력주의자, 겁쟁이의 나라, 대한민국
극 중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각각 내놓는 선택이 쌓이며, 결국 영화 속 대한민국 사회는 배드 엔딩을 맞게 되죠. 특히 쿠데타를 주도하는 악인들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위기 상황을 맞이하는 상대역들의 반응이 아닐까 하는데요. 겁에 질려 본분을 잊고 일신의 안위부터 챙기기 바쁜 자, 악인들이 권력을 잡게 되는 상황이 두려워 쿠데타를 묵인하고 용인하는 자, 주변의 간언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다 모든 일을 그르치는 자까지, 다양한 군상이 저지르는 황당한 일들이 업보가 되어 끝내 전두광과 하나회를 최고 권력의 길로 이끕니다.
결국 이런 씁쓸한 결말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아마 기획 단계에서부터 영화의 종착 목표가 아니었을까 하는데요. 영화의 실제 모델이 되는 인물들은 죽을 때까지 한점 부끄럼 없는 양 호의호식하며 떳떳하게 살아가고, 이들을 추앙하는 세력 역시 각종 망언과 망발을 서슴없이 이어가고 있죠.
어디 그뿐입니까? 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에 호화로운 변호인단을 써 가며 이의를 제기해 이겨 먹는 추악한 후손들과, 또 그런 일을 용인해 주는 자들이 있는 나라, 군부 하에서 "빨갱이" 몰이를 하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정작 정의를 되찾을 때가 오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며 시스템 뒤로 숨었던 부역자 법관들, 공안검사들이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더 나아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정치에까지 손을 대는 나라, 재판으로 각종 비리, 특히 자녀 진학을 위해 저지른 일들이 상당수 유죄로 최종 인정된 시점에조차, 지지층 결집을 통한 언론 플레이에만 치중하며 한 진영 자체를 초토화시킨 일가족이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점이 정말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이런 모든 군상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특수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만, 좌우 불문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하나같이 이런 꼬락서니라는 것은 국민의 희망을 충분히 꺾고도 남는 일이죠. 하지만 이런 현실에 순응하여 산다면, 우리가 이들과 다른 점이 뭐가 있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서울의 봄은 다시 한번 잔잔한 경종을 울리는 좋은 영화가 아닐까 해요. 우리 주변에 이태신 같은 인물이 더욱 많아지기를, 나 스스로가 이태신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