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얼마 전 BBC 모큐멘터리인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를 리뷰 했는데요. 제겐 주연 필로미나 컹크 역의 배우 다이앤 모건에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게 만든 드라마 시리즈가, 바로 이번 글에서 소개할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After Life)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당연히 넷플릭스에서 독점적으로 스트리밍 하고 있습니다. 총 3개 시즌이고요, 재능 있는 코미디언, 배우이자 프로듀서, 감독이기도 한 리키 저베이스(Ricky Gervais) 주연·제작 작품입니다. 골든 글러브 시상식 호스트 클립이나, 각각 영국·미국 버전의 모큐멘터리 드라마 오피스(The Office) 같은 유명 작품에서 보셔서 익숙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넷플릭스에 스탠드업 코미디 스페셜도 몇 편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요.
개인평 요약 : 8.5/10, 매우 추천!
사랑하는 이를 잃고 너무나도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세상에 등을 진 이가 다시 따뜻한 삶으로 나아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역경 극복기. 가볍고 즐겁게 흘려 보기엔 심리적 충격이 큰 편이기 때문에, 호르몬이나 마음 상태가 불안정하신 분께는 당장 추천하지 않아요.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중년의 남자가 빠진 슬픔의 늪
주인공 토니는 병마에 아내 리사를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 안에서 살아갑니다. 정말 말 그대로 살아갈 이유와 목적 자체를 찾지 못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데요. 그에게 이제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리사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노트북으로 남긴 영상편지들 뿐입니다. 그 안에서 리사는 토니에게 꾸준히 "잘 살아가라"라고 주문합니다. 그의 존재가 필요한 곳에서 밝게 빛나며, 남들을 웃게 하고 그 자신도 행복해지기를 바라죠. 하지만 그걸 믿고 마냥 따라가기엔 그는 너무 슬프고, 지쳐 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죽지 않고 살아가며 정말 최소한의 생활을 이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 리사와 함께 기르던 가족인 강아지 브랜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브랜디는 단 하나 남은 식구이자, 여기 이곳에 리사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마지막 매개입니다. 시리얼에 부을 우유는 까먹어도, 브랜디의 습식 사료 캔 사 오는 것은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말 미약한 실타래 하나가 그의 무거운 삶 전체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때문에 그의 생활에서 그 나머지 것들은 아무래도 관계없다는 느낌이 되어버렸습니다. 타인의 실존적인 가치를 느끼지 못해 항상 비관적이고 날카롭죠. 동정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한날한시에 똑같이 누이를 잃고 슬퍼하는 동지이자, 토니가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노력하는 처남 맷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요양원에 있는 치매 노인인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방문하기는 하지만, 애정에서 우러난 행동이라기보다는 관습 내지는 요양원과의 약속을 지키는 의례와 같이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전의 행복한 그였다면 하지 않을 여러 크고 작은 기행을 행하기도 하고요.
지옥은 타인이라지만, 구원도 타인 속에 있었다.
처지야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출발점*부터 이 모양이니 과연 이런 주인공이 갱생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시청자 자신까지 비관적으로 만드는 드라마가 아닐 수 없는데요. (*위에서 스포일러를 많이 한 것 같아 보여도, 거의 예고편 수준입니다.) 놀랍게도 시즌을 거듭하며 토니는 점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그런 놀라운 변화를 만드는 것은, 토니 본인과 함께 그를 돕는 주변인들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든, 질색하는 불청객이든, 구면인 직장 동료이건, 새로운 친구이건 구분 없이 모두가 그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서서히 이후의 삶을 마주 보게 만듭니다.
물론 더 해맑고, 행복한 사람이 된다거나, 사랑하던 리사보다 더 큰 삶의 목적을 찾게 된다거나 하는, 동화와 같은 해피 엔딩은 없습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던 압도적인 공허함 대신, 작게나마 한 발 한 발 내딛고 오늘을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찾아가게 되죠. 세 시즌을 끝까지 완주하면, 시리즈 타이틀이 After "Life"인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저베이스 그 자신의 투영과도 같은 프로그램이 아닐까...
물론 영화나 드라마도 훌륭합니다만, 저는 사실 리키 저베이스의 픽션보다는 현실에서의 코미디를 조금 더 즐기는 편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혹은 공식 소셜 계정에서 올리는 다른 클립 단위의 스탠드업 쇼라던가, 역대 주관한 골든 글러브 시상식 클립도 대부분 찾아보았고, 농담 소재로 트위터를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내용이 궁금해서 트위터를 안 하고 있는데도 연루된 트윗이나 관련 기사도 몇 번 찾아본 경험이 있고요.
그의 특징이라면 굉장한 독설가라는 점이 가장 눈에 띄죠. 거의 애프터 라이프의 토니 그 자체입니다. 원래 얼마나 시니컬하고 냉소적인지, 그의 코미디를 좀 찾아보신 분이라면 얼마나 때론 대중을 미워하고 엘리트주의자처럼 보이는 사람인지 익숙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의 거친 언행은 코미디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 취하는 수단이라고 할까요, 양파로 치면 가장 겉껍질과도 같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모두 까기 인형과 같은 매콤한 자세로 시작하지만,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어느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가 사람들과 세상에 얼마나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어요.
이렇다 보니, 애프터 라이프를 보면서 주인공 토니는 물론, 모든 등장인물들을 아울러 스토리라인 전반에 리키 저베이스이 말하고자 하는 바, 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제각각의 슬픔을 간직한 채, 어딘가 망가져 있으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미련한 결정을 이어가지만, 서로에게 내뻗는 손을 잡고 삶의 희망을 찾아 내일을 마주할 힘을 얻는다는 저베이스식 따스한 인간애(humanity)를 느낄 수 있는 좋은 드라마입니다. 약간은 우울하고 센티멘탈하지만, 잔잔한 울림을 주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찾으신다면, 넷플릭스의 애프터 라이프를 꼭 추천드려요.
P.S.
애프터 라이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을 또 하나 들자면 사운드 트랙이 아닐까 해요. 세 개 시즌 전체에 나온 음악들의 리스트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특히 시즌 3에서 Joni Michelle의 'Both Side Now', Radiohead의 'Let Down'이나 Death Cab for Cutie의 'I Will Follow You Into the Dark' 같은 노래들을 만날 수 있어 굉장히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