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고객들이 사 주니까요.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게임사들이 옛날 게임을 리마스터하거나 아예 리메이크해서 내놓는 게 새로운 일은 아니죠. 사실 이런 현상은 최근 십수 년 간 콘텐츠 업계 전반에서 있어 온 경향이기도 한데요. 때문에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과거 어느 시점에 대박이 났거나 크고 튼튼한 팬덤이 있는 몇몇 영화, TV 시리즈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왔습니다. DLC 콘텐츠와 스트리밍이 더 보편적인 한국에서는 많이 보기 힘들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선 "콜렉터스 에디션 블루레이 리마스터판" 영화가 매진 행렬을 이어 가거나, 업계를 주름잡던 아티스트들의 명곡·히트송들만 모아 "데뷔 n주년 기념 특별 앨범"으로 판매하는 것이 굉장히 흔한 일입니다.
비단 엔터테인먼트뿐만 아니라, 심지어 출판업계 쪽을 보아도, 베스트셀러 서적의 커버를 바꾸고, 시인성이 개선된 폰트나 글자 크기, 자간 등을 적용하거나, 때로는 한 권짜리 원본을 두 권, 세 권으로 쪼개서 'n+1쇄' 하는 경우가 많죠. 이전판 서적은 이미 시장에 넘쳐나고, 구하려고 마음먹으면 그렇게 얻기 힘든 상황이 아니어도요. 종종 오타나 잘못된 번역 등이 개선되는 경우도 있고, 저자가 직접 내용물을 변경·추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내용적인 측면에서 천지개벽은 없습니다. 같은 책을 더 비싼 값에 사야 한다는 신박한 사실만 빼고요.
콘텐츠 창작자들이 창의력을 잃어버렸다고 맹비난하기 전에, 소비자로서 우리의 모습을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런 재생산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게 소비자에게 먹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니까요. 막말로 '사 주니까 계속 만든다'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이 예전에 즐겼거나, 시기를 놓쳐 구매하지 못했지만 대단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품이, 오늘날의 평가 기준에 맞게 더 나은 그래픽과 음향, 조작감과 (아주 적은 양이나마) 추가된 콘텐츠 등을 가지고 다시 출시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환호하며 구매에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이런 세태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을까요? 콘텐츠 기업들의 가장 큰 덕목 역시 수익이고, 수익을 쫓는 기업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매스 미디어와 상업 콘텐츠의 기본 속성을 잊으면 안 됩니다. 때문에 질문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리마스터/리메이크된 게임을 찾을까요?
소비자에게서 이유를 찾으면 제각각인 개인적 동기를 포함해 정말 많은 사례가 있을 겁니다. 때문에 간단히 일반화가 가능한 몇 가지 가능성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좋았던 옛날에 대한 향수
낡은 추억, 특히 좋았던 시간에 대한 추억은 종종 미화되기 마련이죠. 게임은 기본적으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아예 설계가 되어 있고, 때문에 게임에 대한 추억 역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플레이한 게임은, 좋든 싫든 간에 게이머에겐 삶에서 꽤나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겁니다.
게임을 파는 입장에서 이를 간과할 리가 없죠. 사실 시장 전략 중 향수(鄕愁) 마케팅만큼 단순 명료하고 확실한 방법은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신작보다도 새로 작업한 옛날 게임을 출시할 때, 사업적인 관점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수요 예측입니다. (*물론 최근에, 특히 게임 쪽에선 틀리는 경우도 많아 100%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과거에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게임 콘텐츠가, 현재에 이르러서도 다시 플레이할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잠재적 고객이 발생할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스카이림(The Elder Scrolls V: Skyrim) 리마스터가 사실 이런 예상을 증명하기도 했고요.
결국 사업자 입장에서는, 더 큰 비용을 들여야 하는 신작을 오직 예상치만으로 만들어 내는 것보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수요 예측이 가능한 리마스터/리메이크판을 만드는 게 위험 부담도 적을 수밖에 없고요. 실제로 과거 히트작들이 개선되어 다시 출시된 후 성공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특히 구 성공작이 많은 대형 게임사들 위주로 이런 경향이 굉장히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2. 개선된 하드웨어에 걸맞은 게임 경험
옛날 게임을 현재 사용하는 기기로 돌려 보려 시도한 경험이 한두 번씩은 다 있을 겁니다. 고해상도의 넓은 모니터에 맞지 않아 강제로 늘어나거나 반대로 스크린 극 일부만을 사용하는 조잡한 화면, 과거엔 혁신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식별하기가 어려울 만큼 심각하게 낮은 그래픽 수준, 당장이라도 스피커가 찢길 것 같이 찌직대는 음향 효과나 배경 음악에 고통받으며 추억을 되살리고자 노력하게 되죠. 사실 그렇게 플레이라도 가능하면 다행일 텐데요, 상당수 게임들은 사실 최신 환경에서 아예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일례로, 지금 당장 스팀에서 롤러코스터 타이쿤 2(RollerCoaster Tycoon® 2)를 구매해 설치하더라도, 현재 사용하는 OS가 윈도우 7이나 더 상위 버전일 경우 아예 플레이가 불가능해, OpenRCT2 같은 오픈소스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야만 실행이 가능합니다.
역시 이런 불편함은 팬들이 리마스터판을 기다리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존 타이틀을 정가에 구매해 보유 중임에도, 위와 같은 경험으로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더럽히느니 더 많은 돈을 내고 새로 빌드된 게임을 다시 사는 것이죠. 솔직히 말해서, 이런 "개선된" 게임들이 제 값을 할 만큼 양질의 새로운 콘텐츠를 포함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심지어 워크래프트 3의 사례처럼, 약속한 것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대부분은, 좀 더 개선된 게임 리소스와 함께 현재 PC나 콘솔에서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해 주고, 제한된 수준의 콘텐츠만이 일부 추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어마어마하게 성장해 버린 모바일 게임 시장은 이런 경향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상당수 게이머들의 예측과 다르게, 오늘날 게임을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장비는 PC나 콘솔이 아닌, 스마트폰, 태블릿 등의 모바일 기기입니다.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존 디바이스가 아닌 iOS나 안드로이드 환경을 위해 게임들이 다시 만들어지는 케이스가 굉장히 많이 늘었죠. 단순히 낡은 리소스를 교체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유저에게 전가하게 되고, 모바일 특성상 상당수 게임이 F2P이면서 P2W인 BM과 시스템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는 경우가 꽤 있죠. 하지만 이런 식의 플랫폼 이식으로 떼돈을 번 사례가 많아서, 특히 국내에선 많이 시도되었고 아직까지도 개발이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많기도 합니다.
3. 과거엔 없었던 매력적인 추가 콘텐츠
물론 와우 클래식처럼, 과거와 사실상 거의 동일한 경험을 전달하는 목표를 가지고 서비스가 진행되는 게임도 있지만,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리메이크된 게임들은 (적게나마라도) 전에 없던 신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규 아이템 추가나 밸런스 조정처럼 정말 사소한 변화부터, 아예 새로운 스토리라인이나 연속 퀘스트, 기존과 다른 엔딩이 추가되며 게임을 즐기는 방법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요. 기존작을 플레이하는 와중에 있었던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했던 경험이,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개선되어 해소되는 경험은, 게이머들에겐 때에 따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값진 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업계가 성장해 옴에 따라 게임 디자인적인 측면으로도 상당히 발전해 온 만큼, 새로운 콘텐츠들은 과거에 비해 유저들이 게임에 지치거나 질리지 않으면서도 더 오랜 기간 붙잡고 있게 만들기도 하죠. 온라인 게임으로 친다면 기존엔 없던 더 나은 랭킹과 대전 시스템, 유저 간 거래 시스템, 길드/클랜이나 커뮤니티 기능과 같은 것들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경쟁해야 하는 현대의 수많은 최신작들, 그리고 이에 비례해 높아진 유저의 눈높이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새로운 콘텐츠를 통한 개선 작업은 사실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게임사들, 특히 대형 개발사들이 최근 신규 타이틀보다 기존 게임의 리마스터판에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단순히 비교해 보아도, 이미 보유한 옛날 게임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예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쉽고 빠르며, 상대적으로 더 적은 예산만을 필요로 하고, 무엇보다 신작보다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작을 만들던 개발실이, 시장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올스톱되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리마스터나 리메이크판을 만드는 경우 그런 사례가 확실히 적죠.
때문에 리마스터판이 양산되는 이런 악순환이 지속되지 않게 하려면, 게이머들이 이런 게임에 더이상 돈을 쓰지 않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작을 만들며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임사에 대해서는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할 필요도 있고요. 리마스터된 게임의 홍수가 일어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옛날 게임만 못하다"는 평가가 누적된 결과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제로 베이스로 신작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획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업적 리스크에 따라 환경이 개발에 적대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 신작들이 콘텐츠의 양질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어 비판받는 경우가 많아, 게이머 입장에서는 공감하기 쉽지 않을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유저들이 조금은 너그러워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임 개발자들 역시 과거에 비해 유저 피드백에 굉장히 민감하게 대응하는 편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