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드는 회사 다닌다며? 재밌겠다!"
음악, 영화, 게임, 방송, 애니메이션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콘텐츠 제작 업계에 있으면 아마 이런 얘기를 종종 듣게 될 겁니다. 비교적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포맷의 콘텐츠를 다룬다던가, 딱 봐도 재미있어 보이는, 대중적으로 활발히 소비되고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면 확률은 더욱 올라가죠. "우리 모두는 무언가/누군가의 덕후" 라는 식의 이야기가 마치 격언이라도 되는 양 돌아다니는 요즈음,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 일부에게는 간혹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요. 근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요즘 친한 친구들에겐 대놓고 "재미없다"라고 말해주는 편이에요.
사실 대학 졸업 전까지는 저도 비슷했습니다. 평생 이어갈 업을 고민하면서, 정말 죽기 전까지 계속하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일이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3학년 중반부터 전공이고 뭐고 다 버리고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그전까지 그래도 관리한다고 했던 3점 후반대 학점이, 졸업할 때가 되자 3점 초반대로 내려앉았고요. 반대로 직무 역량의 관점에서,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고급 스킬을 얻고자 파고들기는 어려웠죠. 개인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음악 업계로 치면 A&R, IT에서는 프로그래밍 전반, 방송 등 업체에서는 카메라 감독 등과 같은 직무를 메인으로 맡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단시간에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취미로, 전공으로 오랜 기간 준비해 오신 분들이 이미 많고, 큰 회사에서 내는 공고 지원자로 이미 중고신입으로 잔뼈가 굵은 분들이 쏟아지듯 밀려 들어와 내 경쟁자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관심이 있는 분야 여러 개를 선별해 세심히 비교했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필드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토대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업무 중 재미있어 보이는 포지션을 목표로 하여 속성으로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이런 전략은 업종, 직무 무관하게 빠르게 취업이 필요하지만 시간이 부족할 경우 아주 유효합니다.
어쨌거나 운이 좋아 다행히 졸업과 함께 좋은 직장에 바로 취업이 되었고 그래서 도전 자체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요. 실제 원하던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는 것이 마냥 좋으냐, 아쉬운 점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딱 '복합적'이라는 평가가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어쨌거나 일단은 회사고, 직장이라 사회생활 하기 개떡 같습니다.
업무도 만만치 않지만 그 이전에, 콘텐츠 업계에서도 피해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사람 문제입니다. 특히나 인건비 비중이 높은 문화 콘텐츠 쪽은 이런저런 불편이 배가 되는 경우가 있고, 실제로도 사건·사고도 많은 편이에요. 개인적으론 업계에 대한 환상을 금방 깨줄 수 있는 피스메이커 1순위라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젊은 업계이기에, 분위기도 "MZ"스럽고 젊을 것이라는 외부의 편견이 있지만 결국 조직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상당수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개인적인 경험과 서로 다른 부서, 여러 업계의 지인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보통 상하 소통이 쉽고, 개개인이 존중받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오피스는 사실 실적에 얽매여 있다거나, 업무량이 굉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분위기마저 구린 곳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게 마냥 나쁘단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렇게라도 숨통을 틔워주지 않으면 죽겠다 싶은 곳들이 주로 좋은 분위기를 강조합니다. 요즘은 기피 대상이지만, 사실 '가족 같은 분위기'를 어필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때문에 단순 PR이나 드라마 따위에 속아 기성 산업군과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으로 장밋빛 사무실을 꿈꾸신다면 지금 접어 두시는 게 본인에게 이롭습니다. 물론 당연히 옛날보단 좋아졌죠. 근데 그건 다른 업종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드라마 등 각종 미디어에 표현되는 콘텐츠 회사의 모습은 대부분 거짓이고, 작가의 플롯을 위한 설정 등의 수단 내지는 막연한 상상력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송 쪽에서는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꽤 자유로워졌고, 그래서 자신들의 현실을 이해해 달라는 어필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정작 비 방송 쪽을 그려 내면서 몰이해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나이가 아닌 자리라는 사실을 평균 연령이 낮은 회사들에서 경험적으로 배우기도 했는데요. 세대가 완전히 달라 공감대 형성이 안 되는 60대, 50대 꼰대보다 힘든 것이 스윗한 척 독사과를 건네는 40대 꼰대이고, 또 알아서 군기반장을 자처하는 동년배의 20대, 30대 젊은 꼰대들입니다. 말 그대로 인력이 창조의 기반이 되는 만큼, 기준이 모호해 가스라이팅이 판을 치고, 실적과 공로를 차지하기 위한 사내 정치가 디폴트로 깔려 있는 경우가 많고요.
신규 입사자에 대한 온보딩도 제대로 이루이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 좋은 학교에서 이런 것도 안 가르치냐?" 라든가 "회사는 학원이 아니다"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는 교육 역량 부족의 시니어들 탓에 제대로 된 인수인계가 진행되지 않을 확률도 높습니다. 업무 진행, 의사 결정도 주먹구구식인 데다 담배 인맥, 회식 인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태반입니다. 실적이 좋지 않은 팀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만, 실적이 좋은 팀에서는 각종 인사 문제가 발생해도 쉬쉬하며 가해자를 덮어 주고 피해자를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이미 규모로 증명되지만, 99%의 콘텐츠 제작 전문사는 중견·중소기업으로, 사회에서 "ㅈ소스럽다"라고 불리며 흔히 회자되는 작은 조직의 병폐를 대부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ㅈ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큰 규모로 성장해서 중견기업급, 준대기업급이 되거나 대기업 계열사가 된 곳들조차 초심을 잃지 않고(?) 개선이 안 된 상태로 덩치만 부풀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덕업일치"는 행복한 직무 경험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직장에서 동료나 상사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칩시다. 여전히 업무 자체를 다시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흥미가 콘텐츠의 소비와 향유에 국한되는지, 콘텐츠 제작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지 직접 느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고 컬렉션 수집과 조립을 즐긴다고, 레고 생산 라인의 생산 관리직을 맡았을 때 무조건 행복할까요? 고객인 나를 행복하게 해 주던 콘텐츠 경험이 제작자로서의 내 업무로 곧장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전체 중 본인이 담당하는 영역은 자신의 직무와 직책 내로 한정됩니다. 운이 좋다면 덕질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요소들과 유관한 업무를 맡게 될 수도 있지만,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제작 인원이 수십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신의 역량과 적성에 맞아 준비한 직무가 많은 경우 단순 반복 작업을 맡게 되고, 개인의 성장이 동반되지 않는 상황도 종종 발생하고요. 예전에는 신입 딱지를 떼고 주니어가 되면 차차 권한과 책임이 더 생기면서 자연스레 커리어가 쌓이고, 콘텐츠를 더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막말로 자신이 총괄급이 아닌 이상 덕업일치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구성원과 회사의 노력이 제각각이지만, 이번 글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어서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다 보니 차라리 영세한 회사에서, 그럴듯하게는 "제너럴리스트"로 불리는 일당백 잡역부로 구르는 게 덕업일치 측면에서는 더 행복할 수도 있겠습니다. 전문성은 떨어지고 사수는커녕 인수인계조차 해 주는 이가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많은 부분을 포괄적으로 다루어 볼 수 있기 때문인데요. 대신 만성적인 업무 과중에 시달리면서 워라밸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때론 터무니없이) 낮은 보상을 받으며, 아마 높은 확률로 정작 덕질을 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게 되어 삶의 나머지 부분들에서 불행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몇 년 전 유행한 "Don't be a lawyer" 패러디 영상들 생각하면 찰떡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
이외에도 마저 지적하지 않은 악습이나 병폐도 많습니다만, 종일 징징대고 싶어서 쓴 글도 아니고, 별도 주제로 잡고 다른 글로 쓰는 게 더 재미있게(?) 나올 것 같아서 생략했습니다. 짧다면 짧은 주니어급으로서 여러 해 동안 문화 콘텐츠 제작에 참가하며 느낀 것은, 결국 내가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콘텐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제작 과정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와 자부심, 뿌듯함 따위의 감정을 느끼며 업에 대한 애정이 생길 때 비로소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한다라는 겁니다.
몇몇 회사의 꽤 다양한 포지션에서 일하면서,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도 있고, 반대로 주말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면서 매일매일 출근이 싫어지는 직장도 있었는데요. 첫 출근 전까지는 내가 어떤 분위기의 조직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운에 맡겨야만 합니다. 조금 암울하죠. 하지만 나쁜 경험조차도 타산지석으로 삼는 긍정적인 마음과 함께라면, 최근엔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이직과 내부 이동으로 본인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너무 우울해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은 언제 생길까요? 제 경우엔 우리가 만든 콘텐츠, 특히 내 작업 결과물에 대해 고객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볼 때 업무 만족도가 급상승하는 경험을 종종 해 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죠. 이런 기분을 처음 느꼈을 때, 내색은 못 했지만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고, 이후 몇 번 반복될 때마다 무덤덤해지기는커녕 일이 점점 즐거워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에 가져온 만화 일부와 같은 광기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예시와 같이 업무에 애착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콘텐츠 업계뿐이 아니라 어떤 곳에서도 충만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또한 관리자는 달아본 적도 없는 팀원 나부랭이에 불과하지만, 동고동락하는 동료와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콘텐츠 업계라는 카테고리와는 더욱더 관계가 없죠. 업무로 시름하거나 개인적인 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인품적으로 훌륭하고 업무 능력도 뛰어난 동료 한 두 명만 있어도 줄어드는 압박감의 크기가 차원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인재 관리에 능하고, 비전이 명확하며 책임 회피를 하지 않는 상급자의 존재 역시 중요하고요. 물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이 있듯이, 평상시에 자신이 조직 내에서 성실히 업무에 임하고, 모나지 않은 신뢰 관계를 쌓아 놓았을 때 유효한 이야기겠지요. 이렇게 믿고 등을 맡길만한 이들과 함께 할 때 더욱 즐겁게 일할 수 있고, 상호 간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더욱 가파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모든 직장에서 공통적인 진리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